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슈페어 (문단 편집) === 군수부 장관 === 전쟁 중반기인 1942년 2월 8일 군수부 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의 강권으로 군수부 장관을 맡았다. 관료들을 싫어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히틀러에게 자신과 건축관이 유사한데다 프로젝트 관리능력까지 출중한 "예술가"인 슈페어는 히틀러의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당시 독일의 전시경제는 관련기관과 권력이 분산된 채로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당료의 과도한 개입과 겹쳐서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슈페어는 군수부 장관이 된 후 히틀러의 지속적인 신임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독일 군수체계에 남아 있던 여러 가지 비효율적인 관행을 뿌리뽑아서 생산성을 높이 끌어올렸다. 다만 이런 관리의 천재에게도 현실의 어려움은 타개하기 어려웠는지 > "누군가가 당신에게 [[교향곡 제9번(베토벤)|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을 '[[하모니카]]로만 연주해야만 한다'고 명령했다고 생각해 보시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 슈페어의 전시생산 관리능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채승병]]의 블로그에서는 나치 독일의 전시경제 생산성 향상은 1930년대부터 투자되었던 대규모 생산시설들이 슈페어의 취임시기와 맞물리면서 완공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독일 경제의 군수품 생산능력을 향상시키는 계획안은 이미 전임자인 토트가 완성시키고 있었고, 슈페어는 단지 그걸 실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군수부 장관을 맡기 전에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때도 슈페어는 그 능력으로 호평을 받고 있었고, 슈페어가 변덕스러운 독재자인 히틀러의 지속적인 호감과 신임을 얻음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난맥상인 독일 전시경제체제를 어느 정도 효율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슈페어의 능력은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주동자 등 여러 반나치 인사들이 '대단한 군수품 생산관리 능력'을 이유로 나치 척결 뒤 예비 내각의 일원(!)에 슈페어를 포섭하려고 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암살 계획은 발각 되었지만, 슈페어는 "아직 포섭이 필요하다"는 말이 붙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결국 [[1943년]]에 이르러 독일경제가 생산하는 군수품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슈페어는 자연스럽게 히틀러의 후계자 후보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치 권력의 상층부에 있던 [[괴링]], [[마르틴 보어만]], [[힘러]]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 나타난 나치 고위층들의 추악한 욕망은 슈페어가 전후에 나치들을 비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들은 1944년 슈페어가 와병하면서 그가 가진 행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했고, 결국 그들의 음모에 질린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군수장관과 건축책임자의 자리를 사임하겠다고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군 원수 밀히를 필두로 하는 군수관련 인사들의 청원 덕분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신임을 다시 얻어서 관련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의 무기 생산량은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심화된 [[1944년]] 후반기에 되어서야 감소세로 돌아선다. 다만 슈페어의 회고록에서 전략폭격은 상당히 평가 절하된다. 그에 따르면,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1943년까진 부정확하고 체계없이 이뤄져서 별다른 타격을 못 입혔으며, 1944년에 가서야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폭격이 이뤄지긴 했지만 효율적인 타격은 아니어서 '''독일의 패망을 몇 달 미뤘다'''고 여겨진다. * 대표적인 예로 악명 높은 [[슈바인푸르트 공습]] 작전이 있다. 독일 전시생산의 속도를 결정하는 '병목' 공정은 볼[[베어링]] 공장[* 전차 전투기 차량등 구동부라는 게 있는 모든 종류의 군장비를 생산하는 데 필수적이다.]이었는데, 슈페어는 연합국의 폭격이 완파 전에 중단되어서 치명적이진 않았으며, 생산량이 38% 떨어진 정도에서 폭격이 그친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고 술회했다.[* 연합군은 당시 376대의 [[미 육군]] [[B-17]] [[폭격기]]들 중 77대나 격추 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도중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히틀러는 피해가 이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다. 또한 루르 지방의 수력발전 댐과 라인강 철교를 폭파시키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각각 파괴되었으면 전력과 공업용수, 프랑스 지역의 독일군 병참선이 붕괴했을 것이란 것이다. 슈페어는 독일의 군수공업의 아킬레스건은 무기의 재료로 쓰는 합금강 생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희토류|희귀금속]]이었다고 밝힌다. 결정적인 것은 1944년 말이었다. 무엇보다 튀르키예에서 수입하는 [[크로뮴]]이 6개월치 이하로 바닥나면서, [[발칸반도]]가 소련에 넘어간 1945년 부터는 무슨 수를 써도 파국을 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 크로뮴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니켈]], [[몰리브데넘]], [[망가니즈|망간]] 등의 비축량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니켈이 없으면 항공기의 구조 재료를 생산할 수 없고, 크롬과 몰리브덴이 없으면 [[균질압연장갑]], 더 나아가 [[6호 전차 티거|티거]]나 [[5호 전차 판터|판터]] 등 전차의 생산은 완전히 끝장난다. 당장 [[티거 2]]가 이런 희귀 금속이 부족하고 폭격 때문에 공정을 야매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져 카탈로그 스펙보다 방어력이 크게 저하되는 추태를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아무 말도 없이 다른 각료들과 신형 전차의 개발을 논의하러 갔다. ~~[[유체이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